20171228 은혜받은 성도의 삶이란 (히브리서 13장 1-9절)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엘리야,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 거인 골리앗과 싸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가슴 설레이는 모험이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도의 삶이란, 반복되는 일상의 현장에서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바느질하고, 빨래를 하고, 요리를 하고, 아침에 직장으로 출근하고,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상의 현장이 우리에게는 성도로서 살아가는 무대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매일매일 나에게 주어진 일상생활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2장까지만 해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소멸하는 불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며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장엄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13장에 와서는 그 위대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일상이란 삶의 현장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1절을 봅시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가족처럼, 내 친형을 대하듯이, 내 친동생을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것보다 한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이더 위대합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보다 한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이더 하나님 보실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니고도 많은 사람들이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쓰인 ‘사랑’이란 단어는 필라델피아 입니다. 형제의 사랑입니다. 작은 것도 함께 나누며 “형님 먼저, 아냐 아우 먼저”하며 서로 존경하며 아껴주는 사랑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서로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자, 둘째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말씀을 보겠습니다.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사랑하는 삶의 자세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본래 여기 쓰인 ‘손님’이란 단어는 ‘나그네’란 말로도 해석이 됩니다. 손님 혹은 나그네 말은 우리 삶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내가 잘해준다고 해서 그가 미래에 어떤 보상을 내게 해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거나, 우리의 선행을 보상해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대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의 조카 롯도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가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 “구두장이 마틴”이란 책이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믿음이 강한 구두장이 마틴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마틴, 아침에 거리를 살펴보거라. 내 너에게 갈 것이다.” 다음 날 마틴은 누추한 구두작업실에 일을 하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의 작업실을 찾은 이들은 잠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린 늙은 청소부, 갓난 아기를 안고 있던 젊은 여인 등 평범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틴은 평소처럼 그들에게 따뜻한 난로와 뜨거운 차를 내주며 그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안 오시나 보다.”하고 하루를 마감하며 집에 돌아온 마틴.. 성경을 읽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틴, 오늘 네가 따뜻한 우유를 주었던 그 늙은 청소부 바로 나였네… 오늘 네가 뜨거운 스프와 빵을 대접한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여인도 바로 나였네…”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마틴은 자신이 읽고 있던 성경의 구절을 읽게 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3절 말씀을 보면 “히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이 말은 “마치 우리가 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옥에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볼 때는 우리가 고통받는 것처럼 그들을 생각해 주라”는 말입니다.

또 성도에가 지켜야 할 사랑의 태도는 남에게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가족에게도 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4절 말씀은 결혼생활에서의 순결함을 강조합니다.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오늘날은 혼인을 가볍게 여긴느 세대입니다. 간음과 음행이 빈번하게 행해지고, 이혼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습니다. 세상은 간음이나 이혼하는 것을 부추기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결혼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은 귀히 여겨야합니다. 성도가 결혼생활에서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거룩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말씀을 왜 히브리서 저자가 여기 적여 있을까요? 그 당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성도는 혼인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5절을 보겠습니다. (히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앞선 4절까지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혼인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제 5절에서는 사랑하지 말하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 바로 ‘돈에 대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 때문에 ‘돈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은 가치 중립적입니다. 칼이 의사에게는 살리는 칼이 되고, 강도에게는 죽이는 칼이 되듯이 칼 자체는 가치 중립적입니다. 돈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은 돈이 나쁘다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돈에 빼앗기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사실 인간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래의 불안한 요소들을 제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 대부분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저자는 우리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사랑’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혼인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은혜받은 성도의 삶이란 바로 이런 일상의 현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주님께서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들을 사랑하는 하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