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1 정체성을 따라 걷는 길 (히브리서 11장 20-31절)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돈’ 입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싸우고, 심지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 다음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두 가지만 더 뽑자면, 높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권력’과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인정해주는 ‘명예’ 입니다.

한 사람의 삶 속에 돈, 권력, 명예 이 세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아주 성공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모세는 바로 이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나일강가에서 목욕하고 있던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그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과 풍요로운 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거대한 애굽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세는 가는 곳마다 애굽의 모든 매스컴이 따라다녔고, 사람들은 그를 보고 “나도 모세처럼 한 번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말할할정도로 그는 인생의 부, 권력, 명예 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모세는 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첫째로 그는 권력을 버렸습니다. 24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사는 삶을 내려 놓았습니다. 이게 글로 쓰여 있으니까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 엄청난 포기였습니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양아들로서 장차 애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을 충분히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자리를 박차고 화려한 왕궁에서 사는 왕자의 신분에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떠돌이 목자의 신분으로 내려 왔습니다. 주변에서 모세의 이러한 행적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저런 바보가 있나! 넝굴채 들어온 복을 지발로 차버리다니!” 그럼 도대체 왜 모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애굽의 왕자 자리를 버린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5절 말씀입니다.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여기 25절에 우리는 모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애굽의 왕궁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자기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흔들림 없는 정체성이 그로 하여금 애굽의 그 어마어마한 권력도 포기하게 했습니다. 권력을 포기한 그는 이제 둘째로 ‘부’를 포기했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날 사우디 왕가의 재산을 합치면 Million 도 아니고 Billion도 아니고 Trillion 입니다. 억 단위가 아니라 조 단위 입니다. 구약시대 애굽은 전 세계 가운데 가장 큰 부를 누리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누릴 수 있던 부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모세는 그 쌓아도 쌓아도 끝을 모르는 보화 대신 무엇을 택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택했습니다. 26절에 이것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말은 애굽의 모든 보화를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 더 값진 것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모세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26절에서 사용된 ‘능욕’이란 말은 고난, 고통, 혹은 망신, 수치 입니다. 즉 모세는 부를 버리면서 동시에 세번째로 ‘명예’도 버린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그 모든 명예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명예스러운 삶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새벽 설교를 준비하면서 모세의 삶을 보며 제 마음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목회자라고 하지만, 여전히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는 탐심이, 더 누리려는 욕심이 제게는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을 세상의 보화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가?”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못 들겠더라고요. 그럼 도대체 모세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그는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릴만큼 급진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비결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26절을 다시 봅시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애굽 보화보다 더 값지고 더 큰 상을 주실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금은보화가 아무리 화려하고 그 반짝이는 빛을 자랑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 보화와는 비교도 안될 것이란 확신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 다음은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자, 여기가 중요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꿋꿋이 인내하며, 꾸준히 견디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눈이 땅에 있지 않으니까 땅에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부도, 권력도, 명예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볼 때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상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난과 멸시, 능욕과 수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는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식하는 견고한 내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정체성 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실 상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성도가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때 그는 외적인 환경과 상황에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믿음의 행보를 걷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떤 정체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오늘 이러한 정체성을 따라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