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4 거룩함을 향한 결단 (열왕기하 23 8-15)

무더운 여름 바닷가에서 신나게 놀다 보면 종종 눈에 모래가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크기는 매우 작은 모래알이지만 눈에 들어가면 사람이 눈을 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눈을 물로 씻어내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호’ 불어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모래알 하나가 전체 눈을 마비시키는 것이죠. 죄는 모래알 같습니다. 죄는 우리 영혼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우리의 영혼의 기능들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죄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모래알처럼 작은 죄라도 우리 영혼에 들어온 순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인류가 지은 첫 죄는 ‘과일을 따먹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온 인류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갖고 있는 인간은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이 바로 죄를 제거하는 데 열심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는 남 유다 전역에 공공연히 지켜지고 있던 우상들에 대해 눈감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전 왕들은 종교적인 개혁을 했어도 ‘산당’만큼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은 대대적인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전국에 있는 산당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했습니다. 8절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열왕기하 23장 8절) 여기서 ‘게바’라는 지역은 남 유다의 북쪽 국경에 있는 도시 입니다. 브엘세바는 ‘남쪽’ 국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따라서 게바에서 브엘세바까지는 가장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라는 말입니다. 즉 전국에 있는 산당들에서 우상을 섬기지 못하도록 산당을 더럽게 만들었습니다. 열왕기하에서 ‘산당’하면 은밀한 죄, 끊어내지 못한 죄를 말합니다. 많은 왕들이 하나님을 따랐지만 이 산당만큼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산당’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만 여전히 끊어내지 못한 죄, 남들은 모르지만 나만 아은 은밀한 죄. 그 죄들이 바로 우리들의 ‘산당’ 입니다. 요시야 이전의 왕들이 이 산당을 무시하고 제거하지 않자, 결국 영적 올무가 되어서 계속해서 남 유다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죄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 크기에 상관없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갉아먹습니다.

병원을 찾은 환자가 여러가지 검사를 받은 후 의사의 소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트를 들고 병실을 찾은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환자 분, 지금 몸 안에 암덩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작고 단순하게 하나 밖에 없습니다. 돈도 들고 힘드시니까 수술하지 마시고 그냥 두시죠.” 이렇게 말하는 의사는 돌팔이 의사 입니다. 암은 크기나 숫자의 상관없이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은 계속해서 우리 몸 구석구석으로 전이 됩니다. 그래서 건강했던 세포들을 죽이고 우리 몸을 병들게 합니다. 죄는 암덩이 같습니다. ‘이 죄 하나즘이야…’하는 생각으로 죄를 놔두면 결국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습니다. 죄가 번식합니다. 그리고 결국 죄가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왜 그토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살아가던 다윗이 간음죄 살인죄와 같은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까? 그 시작은 직무태만이었습니다. 왕으로서 전쟁에 나갔어야 했는데, 안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게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일하는 시간에 자고, 남들 자는 시간에 깼습니다. 그래서 밤에 홀로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댐에 난 백원자리 크기만한 구멍으로 인해 댐 전체가 무너지듯이, 철로를 이어주는 나사 하나가 빠져 수백명을 태운 기차를 탈선 시키듯이 작은 것에서부터 큰 불행들이 시작됩니다. 죄는 작은 것도 쉽게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죄에서 넘어지는 자는 결국 큰 죄에서 넘어집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입니다.

남 유다도 처음부터 심각하게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니까 조금 있으니까 산당에 우상이 세워졌습니다. 우상이 세워지니까 무당들이 들어오고,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가 들어왔습니다. 무당과 점쟁이들이 아들 딸을 자녀로 바치라고 하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죄가 번식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남 유다 시골에서만 이런 풍습이 행해졌는데, 점점 죄가 번식해서 수도 예루살렘까지 들어오고 결국 여호와의 성전 중심 안쪽까지 우상이 세워졌습니다. 작은 죄가 결국 큰 죄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요시야는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산당과 우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의 개혁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10절에 보니 더 이상 자녀들을 우상에게 바치지 못하도록 이방신 몰록에게 제사를 드리던 힌놈의 골짜기를 더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11절에 태양신을 위해 마친 말들을 제거하고 수레들을 태워버렸습니다. 12절에 여호와의 성전에 세워있는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제거했습니다. 눈 여겨 볼 것은 13절 입니다. “또 예루살렘 앞 멸망 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왕하 23:13) 13절을 보면 솔로몬 때 세워진 우상들이 요시야 때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됩니다. 요시야는 남 유다의 16대 왕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 아무도 감히 솔로몬이 세운 우상은 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야금야금 몰래 우상에게 가서 제사 드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전 왕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왕 솔로몬이 지은 우상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면 과감하게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요시야 왕처럼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를 끊어내겠다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삶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그 자리에서 머무는 신앙생활이 되어버립니다. 죄가 남아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나아질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장 1-2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껍데기만 남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찬양을 불러도 기쁨이 없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손바닥에 나무조각이 박히면 얼마나 아픕니까? 조그마한 나무조각일지라도 우리는 하던 일을 다 멈추고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핀셋, 족집게를 가지고 집중해서 손에 박힌 나무조각을 빼내려고 애를 씁니다. 죄도 그런 진지한 자세로 제거해야 합니다.

한참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어떤 군대가 장군이 없어서 패배하여 버렸습니다. 그 장군이 올 수 없었던 이유는 말이 없어서 그러했습니다. 그 말이 올 수 없었던 이유는 말발굽이 없었습니다. 말발굽이 없었던 이유는 그 굽쇠의 못 하나가 잘못되어 신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장군은 그 작은 못 하나가 없어서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고 그 군대는 패배하게 된 것입니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결국 영적 전쟁에서도 패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산당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은밀한 죄, 버리기 싫은 죄, 정리하기 싫은 그 죄들을 과감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거룩함은 내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어 진 컵에 최고급 음료가 담겨 있어도 그 안에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있으면 누가 그걸 마시려 하겠습니까? 차라리 종이컵에 담긴 깨끗한 생수를 택할 것입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을 위하여 전국의 모든 산당들을 제거하는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 안에 남은 죄들을 과감하게 끊어 내시는 복된 결단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