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0 기도를 부탁하라 (열왕기하 19 1-7)

16세기 영국에서는 카톨릭과 개신교 간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1세는 많은 개신교 성도들을 죽였고 ‘피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절대군주요, 강한 군사력을 가진 메리 여왕이었지만, 그녀가 두려워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장로교의 창시자라 불리는 ‘존 낙스’ 입니다. 그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주시든가 아니면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기도할 만큼 목숨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메리 여왕조차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백만 군사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 도대체 ‘기도’가 무엇이길래 피의 여왕 메리조차 무서워 할만한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존 칼빈은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것이다.” 존 칼빈의 말대로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힘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기 위한 간절한 기도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적군이 사방을 포위했고, 먹을 것은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적군의 지휘관 랍사게는 항복을 종용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남 유다를 대놓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옷을 찢고 굷은 베를 입었습니다. 이는 히스기야 왕이 슬픔과 분노에 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슬픔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이었고, 분노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에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1절에 보니 그는 이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여호와의 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히스기야가 무엇하러 성전에 갔겠습니까?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기 위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과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함께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3절 말씀을 봅시다. “저희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왕하 19:3) ‘곤란’은 지금 당한 상황을 말합니다. ‘책벌’이란 말은 ‘심판’이란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히스기야는 지금 남 유다가 당한 고난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 때문에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능욕’이란 말은 ‘부끄러움’ 또는 ‘수치’란 말로 랍사게로부터 당한 수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남 유다가 당한 위기의 상황을 묘사하며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 산모가 아이를 내보낼 힘이 없습니다. 이러면 산모도 죽고 아이도 죽습니다. 전쟁은 치뤄야 하는데 앗수르 앞에 남 유다 군사는 메뚜기 입니다. 이거는 싸워보지 않아도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 입니다. 전투에 나갈 때는 되었는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마치 아이를 분만할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히스기야가 비통한 목소리를 이사야 선지자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히스기야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저 이방인 랍사게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훼방했다는 사실 입니다. 4절에 그가 말합니다.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왕하 19:4)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도 분명 랍사게한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셨을 것이라 말하며, 하나님께서 저를 꾸짖으실 것이 분명하니 이사야가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6절 입니다.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왕하 19:6)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두려움과 겁에 질린 백성들의 마음을 먼저 위로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저 신복이 한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평강을 약속해 주시는 성경의 독특한 표현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불안한 히스기야와 남 유다 백성들에게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미리 예언 해 주셨습니다. 7절 말씀 입니다.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 19:7)

인간적인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면 앗수르라는 강력한 군대와 싸워서 전쟁을 이기는 방법은 그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빌려오거나, 더 강한 무기를 갖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이 많은 앗수르 군사들을 무엇으로 물러가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칼도 아니고 활도 아닌 “풍문”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스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 사람들을 치러 온다는 소문이 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모든 병력은 구스와 싸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7절에서 칼로 죽게 되리라고 예언 된 사람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 입니다. 히스기야는 칼 한 번 휘둘러 보지 않고도 이 적군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는 승리의 약속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역사 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백만 군사보다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를 두려워한 것처럼, 히스기야 한 사람의 기도가 이처럼 앗수르 군대를 무찌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고민들과 문제들을 놓고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라의 위기 속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기 위해 여호와의 전에 들어 갔듯이, 고통과 어려운 일들이 있을수록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