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여러 이방민족들이 사마리아로 거주지를 옮기게 됩니다. 사마리아에 정착하게 된 이들은 고향 땅에서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제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산당에 그 우상들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역에 우상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우상들의 종류가 30-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이름도 생소한 열방의 우상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땅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31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이런 내요이 나옵니다.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이스라엘 땅 안에서 자녀를 불살라 신에게 바치는 행위가 일어났습니다. 즉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고, 그들이 행해오던 이방 의식도 병행했습니다.
그런데 32절에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지금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위해 자녀를 불태워 죽이는 이 이방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습니다. 경외하다는 말은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열왕기하 17장 25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평생 섬겨온 우상도 섬기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종교다원주의”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의 신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을 동시에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로 표현해 보자면 하나님도 신이고, 알라도 신이고, 부처도 신입니다. 그래서 전부 다 섬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도에 가면 신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신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 입니다. 또한 일본 사람들도 다양한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 가운데도 일본의 신들을 섬기면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그 많은 신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종교 다원주의를 강력하게 반대 합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방의 모든 신은 헛된 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탄의 부하들일 뿐 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여러 신을 함께 섬기는 ‘종교 다원주의’를 배격하고 ‘여호와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우상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있습니다. 32절에 등장하는 이방 민족의 모습을 봅시다. 그들은 자기들 중 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33절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왕하 17: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왜 고대 사람들이 한 신을 섬기지 않고, 다양한 신들을 섬겼을까요? 그것은 각각의 신들이 자기의 욕망을 이뤄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농사를 짓는 사람은 바알이 비를 내려줄 것이라 믿었고, 아세라를 믿는 사람은 그 여신이 풍년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뤄줄 것이라 생각되는 우상들을 다 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도 그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이방 사람들처럼 산당에 우상을 세워놓고 그것에 제사드리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고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우리가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다면, 재물이 우리의 신, 즉 우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재물 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내면에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나의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 세상은 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사랑할 때 세상은 나의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사랑할 때 사람이 내 우상이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이 그들의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권력’이 우상이고, ‘인기’도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 쾌락을 더 사랑한다면 바로 ‘세상’이 내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지 말아야 할 우상은 절에 있는 부처 신상과 같은 형상을 가진 우상 뿐만이 아닙니다. 내 내면에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방사람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은, 사실은 여러 신을 통하여 삶의 안락과 복을 누리고자 했던 자기 내면의 욕망을 섬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욕심을 예배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예배하는 마음 속 숨은 동기들도 훤히 다 보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방 민족처럼,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어도 그의 내면에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비로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돌려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