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6장 8절 말씀을 보면 남 유다의 왕 아하스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금과 은을 앗수르 왕에게 주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9절에 앗수르 왕은 아하스 왕의 청을 수락하여 남 유다를 공격한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치고 아람의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이에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다메섹을 찾아갑니다.
그는 거기서 다메섹 사람들이 섬기던 제단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게 됩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단보다 크기도 컷을 뿐더러 더 좋아 보였습니다. 이에 아하스는 즉시 다메섹 제단의 설계도와 모형을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우리야는 아하스 왕이 보내준 설계도에 따라 제단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전 그 일을 끝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에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흡족하고, 만족해하고’라는 뜻입니다. 아하스 왕은 크고 화려한 앗수르의 제단을 보고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놋 단이 아닌 새로 만든 큰 제단 제물을 바쳤습니다. 제단은 이방신을 섬기기 위한 제단의 모형인데, 제사를 드리는 방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방신들을 섬기기 위해 설계된 제단 위에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 모든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방식이 율법에 적힌 그대로 였다고 해서 아하스가 여호와를 섬긴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제사를 이방신에게 드린 것이죠. 14절 말씀을 보면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명하여 제작하게 하신 놋 제단을 옮겨버립니다. “놋 제단을 새로 만든 제단의 북쪽에 두었다.”는 말은 놋 제단을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세상 방식이 크고 화려하고 눈에 보기 좋아 보인다고 해서,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놋 제단을 옮겨 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짓는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자, 성당들이 너도나도 교회 건물을 마치 성처럼 무지막지하게 짓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인데, 예배는 뒷전으로 옮겨진 채 ‘건물 멋있게 짓기’에만 열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 화가, 미술가들을 통해 교회 안에 미술품들을 꾸미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 안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은 등한시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오늘날까지 건물만 남아 있지만, 예배 드리는 자는 없는, 오직 관광객들이 오고 가는 죽은 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는 너도나도 건물 크기와 성도 수를 자랑하며 예배당을 크게 짓고,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꾸미고, 수준 높은 찬양대를 가지면 최고의 교회라고 생각하는 일들일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들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가장 중요한 놋 제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석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예배가 변질되고, 예배의 본질인 말씀이 빠진 겉치레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크고 화려한 세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앗수르의 제단으로 말미암아 구석으로 옮겨진 놋 제단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우리 삶의 중심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겉이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빠져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말씀 후반부에 아하스가 “놋제단은 내가 여호와의 뜻을 여쭈어 볼 때만 쓰겠소.”하고 말한 부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놋 제단은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거나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기구가 놋 제단입니다. 놋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제사장도 자신의 죄를 씻고 성전에 들어갔으며, 백성들의 죄도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놋 제단입니다. 그런 놋 제단을 아하스는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여호와의 뜻을 여쭈어 볼 때만” 사용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만 언제만 찾습니까?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평상시에 전화 한 통 없다가, 갑작스레 돈 필요할 때만 전화해서 친한 척 이야기하는 친구는 얼마나 얄밉습니까? 마찬가지로 평상시에는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고 기도도 말씀도 전혀 보지 않다가, 갑자기 신변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겨서 필요할 때가 되면 허둥지둥 하나님께 찾아와 도움을 구하는 신앙도 그렇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의 놋 제단을 등한시 했습니다. “내가 나중에 혹 쓸 일 있을지 모르니까 놋 제단을 저 구석에 두어라.” 그에게 하나님은 그저 자기가 원하고 필요할 때만 찾아도 되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시하십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놋 제단을 옮기고 이방신을 섬기는 큰 제단을 설치했을 때, “이제는 내가 복을 받겠지! 이제는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큰 착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떠난 삶은 이미 뿌리 뽑힌 장미나 다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 없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이미 그는 말라가고 시들기 시작한 꽃 입니다.
18절에 보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한 아하스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고 맙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가깝게 일하는 어떤 한 장로님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10분 전에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각하께서 급하게 찾으십니다. 지금 각하께서 누구누구도 함께 부르셨습니다.” 고민이 됩니다. 예배를 드려야 할까? 아니면 지금 바로 청와대로 가야 하나? 그는 잠시 기도한 후 대답했습니다. “각하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인지 한 번 물어봐 주겠나? 만약 그렇다고 하신다면 지금 당장 가겠네.” 전화를 한 비서가 다시 연락이 옵니다. “각하께서 오늘 예배를 드리시고 월요일에 함께 이야기하자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의 크고 화려하고 강해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놋 제단 보다 좋아 보여도 하나님의 놋 제단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즐거운 것들이 많아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자리를 사수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자리를 사수하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온갖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킬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예배를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