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Good is the enemy of Great) 짐 콜린스가 말한 것을 풀이해 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단계에 이르면 거기에 안주해 버리고 위대한 것을 시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교들은 있지만 위대한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좋은 정부들은 존재할지 몰라도, 위대한 정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위대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삶에서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경제학자 짐 콜린스가 발견한 이 사회 현상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성도로서의 삶에서 만족할 뿐,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지만, 날마다 복음에 자신을 비춰보고 복음에 온전히 헌신하여 살려고 도전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위대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왕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신앙과 별개로 살아간 북이스라엘 왕 베가 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나름 하나님을 섬기기는 했으나… 여전히 죄와 타협하며 살아간 남 유다 왕 요담 입니다. 먼저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앗수르가 침략해 오게 하시고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사로잡아 가게 하셨습니다. (왕하 15:29)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부하에게 배신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섬긴 남유다 왕 요담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33절을 보니 요담은 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스물 다섯살이었고 그는 16년간 남유다를 통치했습니다. 34절에 나오는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요담은 오늘날로 말하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신앙 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교회 다니는 집안이고, 집안 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가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매우 익숙한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사장들을 통해 성경 인물들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율법의 내용도 귀동냥으로 들은 것만해도 상당히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도 자연스럽게 왕이 되어서도 자기 아버지를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자는 그의 삶에 오점으로 남은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35절 말씀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요담은 산당을 남겨두었습니다. 산당은 은밀한 죄를 의미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은 믿지만, “이것만은” 버리기 어려운 죄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재물이란 산등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의 정욕이란 산당을 혹은 성적인 유혹이란 산당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 즐거움이란 산당과 세상 자랑 산당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긴 하는데 아직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버려야 하는 걸 알고, 내 신앙의 양심도 그만 버리라고 말은 하는데… 자꾸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산당 입니다. 요담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자 백성들도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했습니다. (왕하 15:35) 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고 분향한 것입니다. 요담의 죄가 남 유다 백성의 죄로 퍼져간 것입니다.
결국 완전히 불순종한 북이스라엘 왕 베가나, 부분적으로 적당히 순종한 남 유다 왕 요담이나 동일하게 각각의 왕국을 패망으로 이끌고 가버렸습니다. 요담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 저는 그래도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저도 북이스라엘 왕 베가처럼 대우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불순종이 죄악인것처럼, 적당히 타협한 순종도 죄악입니다. 우리가 먹다 남은 반쪽자리 음식을 대통령이나 귀인들에게 내어놓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 반쪽자리 순종은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부분적으로 순종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면,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제가 계속해서 산당은 없애지 않고 있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계속해서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죄와 타협하고 살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결혼생활도 한 사람과 결혼하여 내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이 온전한 결혼생활이지, 결혼은 이 사람이랑 하고 사는 건 다른 사람이랑 사는 것은 외도요 간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신부요 교회인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와 함께 살면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 되어 버립니다. 결혼생활을 하며 99%에 만족하는 배우자는 없습니다. 1%라도 배우자의 마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기분 상하고 불쾌한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99%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100%를 원하십니다. 사실 ‘반쪽자리 순종’이란 말 자체가 어폐가 있습니다. 오직 온전한 것만 순종이지, 다른 것은 다 불순종 입니다. 성경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8절)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레위기 11:4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100%를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도 주님께 100%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가사대로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이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마음 깨끗게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 찬양의 마음을 우리의 삶의 예배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하루 하나님 아버지께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을 드리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기쁨이 되시는 복된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