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3 완전히 꺼지지 않은 죄의 불씨 (열왕기하 13 1-9)

 

어버이날 아침, 아버지는 우연히 아들녀석이 손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한태 줄 편지를 쓰고 있나 보구나…’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하루가 다 가도록 아들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주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자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까 아침에 편지는 누구에게 쓴 거니?”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기를 “옆집 아저씨에게 그 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썼어요. 저는 옆집 아저씨가 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하고 말합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아들녀석이 너무나 괘씸합니다. 그 동안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었건만 아들 녀석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옆집 아저씨한태 고맙다고 인사하질 않나, 게다가 옆집 아저씨가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하질 않나… 아버지의 마음이 단단히 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이 철없는 어린 아들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채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봄에 파종 하기 좋도록 하늘에서 이른 비를 내려주시면, 금송아지에게 가서 “비를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합니다. 가을에 추수하기 좋도록 늦은 비를 내려주셔도, 또 금송아지에게 감사제물을 바치러 갑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어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본문 2절을 보니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란 여호와를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노하사 아람의 군대로 북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셨고, 전쟁에서 패한 북이스라엘은 아람을 섬기게 됩니다.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고 그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이 모든 재앙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섬긴 죄의 결과였습니다.

여호아하스 왕은 아람 사람들이 괴롭히고 못살게 굴자, 너무 힘든 나머지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좀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좀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우리 같으면, “너 나 버리고 금송아지 섬기더니 꼴 좋다. 좀 더 당해봐라.” 그랬을 법도 합니다만, 하나님은 역시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라도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아무리 자녀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라고 해도 그의 부모는 감옥에 갇힌 자식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그 사람이 못된 죄인이라고 해도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자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다함이 없습니다. 비록 여호아하스가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으나,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슴 아파하듯이, 사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대 받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람 군대에게 학대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3: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용서 해주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6절 말씀을 봅시다.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 아람 군대가 물러나고 숨통이 좀 트이자, 여호아하스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여로보암의 죄로 돌아갔습니다. 또 다시 금송아지 갔다 두고, 이제는 아세라 우상까지 세워 두었습니다. 앞서 힘들 때는 “하나님 살려주세요!”하고 찾는 듯 했지만, 이제는 살만 해지니까 또 다시 죄의 길로 빠져버렸습니다.

가마 속 숯을 자세히 보노라면, 겉은 다 타서 불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숯 속에 시뻘건 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아스의 회개가 이런 숯과 같은 회개였습니다. 겉으로는 죄를 다 정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아직 꺼지지 않은 죄의 불씨가 남아있던 것입니다. 회개할 때 죄의 불씨를 완전히 소각해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이전보다 더 큰 불이 되어 버렸습니다.

벽에 있는 곰팡이를 완전하게 다 제거하지 않으면 남아 있는 곰팡이 균이 시간에 따라 차츰차츰 자가번성하여 또 다시 온 벽을 채우게 됩니다. 몸 안의 암덩어리도 그러합니다. 완전하게 다 제거하지 않으면 남아 있는 암세포가 또 다시 다른 몸에 전이 됩니다. 죄의 습성이 그러합니다. “이 정도는 남겨둬도 되겠지…”하고 죄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죄라 할지라도 남겨두면 작은 불씨가 커다란 산 태우는 꼴을 당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죄는 또 다시 큰 죄를 낳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는 청산할 때 확실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타협점을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에 남아 있는 죄를 제거하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며 세상 사람들은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하고 우리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스스로가 얼마나 죄에 연약한 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아하스가 금송아지 섬기는 죄를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왔더라면, 만약 그가 죄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고 여호와께 돌아왔더라면, 북이스라엘의 온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나라는 부강하고 전에 없던 황금기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아 있던 죄의 불씨가 결국에는 여호아하스를 죽게 만들었고 이스라엘도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의 결과가 이처럼 무섭습니다. 따라서 죄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죄와 씨름하여 싸우다 보면, 왠지 그리스도인인 나는 지나치게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 같고,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인생을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거나 즐기며 산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멋있어 보이고 ‘cool’ 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나는 저렇게 살면 안됩니까?”하고 소리치고 싶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손해보는 것처럼 느껴지고, 자유를 빼앗긴 채 억압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것과 옆집 아들을 대하는 것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세상 방식대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쉽고 편해서 찾는 이가 많지만 그 길 끝에는 썩어질 것과 죽음뿐 입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찾는 이는 적지만, 그 길 끝에는 영생과 복락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이 성화의 좁은 길이야말로 복된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죄의 불씨를  남겨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댐에 난 100원짜리 크기만한 구멍이 비록 처음에는 작아 보여도, 시간이 차차 흐름에 따라 수압을 이기지 못해 결국 댐 자체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죄는 완전히 그 불씨를 제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방치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이전에 회개하고 매듭을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방심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또 다시 커져버린 생활 속 죄의 모습은 없습니까? 오늘 이 하루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우리 안에 해결되지 못한 죄들을 청산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시는 귀한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