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2 끝이 아름답지 않은 인생 (열왕기하 12 17-21)

 

 

우정은 힘들 때 진가를 발휘 합니다. 내가 돈이 많고 잘 나갈 때 옆에 붙어 있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병들고 아프고 가난할 때도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인 셈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배 부르고 잘살 때 하나님께 붙어 있는 신앙도 귀하지만, 삶에 고난의 슬픔과 시련의 눈물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붙어 있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붙들고 살아 갈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의 믿음은 진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아스 왕은 이런 면에서 참 아쉬운 사람입니다. 그는 성전을 보수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자 그의 신앙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본문을 보니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침략하기 위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는커녕, 기도 한 번 안했습니다.

요아스는 궁여지책으로 재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습니다. 그는 선조들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금을 다 모아서 아람 왕 하사엘에게 뇌물로 바쳤습니다. 아람 왕은 큰 뇌물을 받고 만족해하며 돌아갔습니다. 겉으로 보면 급한 불은 꺼졌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를 신뢰하면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로 이미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아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금과 물질을 의지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는데 급급했던 요아스는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선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아스에게 성전 보수를 위한 열심은 있었으나, 신앙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의 분량이 그 사람의 신앙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역은 많이 하고 있지만 여전히 믿음 없이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아스가 열심히 성전을 보수했으나,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의지했던 것 처럼… 겉으로 보이는 사역은 풍성하나, 내면의 믿음이 결핍된 ‘모래성’과 같은 신앙생활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바람불고 비오면 모두 다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요아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가르치던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더욱 더 믿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 동안 여호야다의 눈치만 보고 숨어 지내던 방백들이 다시 일어나 왕에게 바알을 섬기자고 제안 합니다. (역대하 24:17 참고) 요아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방백들과 동조하여 여호와 신앙을 버립니다. 이전에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성전 보수에 열심을 내던 자라고 차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요아스는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는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다시 이스라엘에 들여와 그것들에게 절하고 섬겼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요아스 왕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우상들을 버리시고 이전처럼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나 요아스 왕은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역대하 24:19 참고) 한 때 여호와의 성전 보수를 위하여 열심을 내던 왕이 이제는 이방신인 아세라의 목상과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스가랴에게 임합니다. 스가랴가 누구입니까?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가 아기 였을 때 그를 아달랴 여왕의 손에서 구원해주고 요아스를 왕위에 즉위 시킨 인물입니다. 즉 요아스에게 여호야다는 ‘생명의 은인’이고 ‘평생 은인’입니다. 그런 여호야다의 아들이 스가랴 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스가랴를 감동시키자,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하는 말씀이다. `너희가 왜 나의 계명을 어기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느냐?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이제 나도 너희를 버리겠다!” (역대하 24:20 참고) 과연 요아스는 회개 했을까요? 요아스는 명령을 내려 스가랴를 돌로 쳐서 죽여버렸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베풀어 준 은혜도 잊은 채 그의 아들 스가랴를 죽여버린 셈입니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이 일을 굽어 보시고, 갚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요아스를 향해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서 재물로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아람 군대가 다시 쳐들어오게 됩니다. 비록 아람 군사는 적은 무리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아스 왕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큰 이스라엘의 무리가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남유다는 심한 타격을 입게 되고 요아스는 전쟁의 피해로 중상을 입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자, 왕의 리더십에 반감을 품은 신복들이 요아스 왕을 암살해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남유다 왕 가운데 부하에게 암살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요아스는 남유다 왕조 가운데 최초로 암살 당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열심으로 보수하던 자가,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의지하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택하자, 결국에는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운동 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Start well’ 뿐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Finish Well’ 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스타트가 좋아도 마무리가 좋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지난 날 열심히 신앙생활 했어도 지금 하나님을 떠나 살면 그가 보여준 이전의 섬김과 헌신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요아스는 시작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끝은 너무도 비참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요아스와 같이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때는 누구보다 큰 열정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겼으나, 지금은 교회를 떠나 세상과 벗하며 살아간 자들… 하나님 나라에서 잊혀져 버린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작이 좋으려면 끝도 좋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처음에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초지일관의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문제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끝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고 구절

(역대하 24: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역대하 24: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역대하 24:19)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역대하 24: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