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5. 대체되는 옛 성전 (마태복음 21장 12-22절)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곳에서는 희생 제사에 필요한 소, 양, 염소, 비둘기를 판매 했던 것이죠.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제물들을 판매하고 있었을까요? 로마 제국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고 있던 수 많은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해외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비록 고향 땅인 팔레스타인을 떠났지만, 율법에 따라 매년 3차례씩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또한 꼭 절기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따금씩 성전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먼 곳에서 오다 보니 제사에 사용될 제물을 가지고 오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무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판매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 입니다. 먼 곳에서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제물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이방인의 뜰’에 하나 둘 모여듭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 유대인들도 매일 드려야 하는 희생 제사의 제물을 이 상인들에게 구매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상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채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전에 물건 값을 깎기 위해 흥정하는 사람들의 소리, 동물의 울음소리가 가득하고, 동물의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도떼기 시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이 배경입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니 성전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소, 양, 염소, 비둘기 파는 상인들과 구매자들이 한데 어울려 매우 혼잡 했습니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은 자리 값 받기 마련입니다. 성전에는 아무 상인이나 와서 장사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였습니다. 상인들과 제사장들이 이 사업에 동업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자료에 의하면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 역시 성전 상인들이 자리새로 낸 돈의 일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소수의 여행객 혹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지극히 필요했던 조치로 시작된 일이었으나,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돈에 눈이 먼 탐욕만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혼잡한 성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밖으로 내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환전하는 자들의 테이블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전 안에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 환전업자들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달라 가지고 한국 가면 원으로 환전하지 않습니까? 이 당시에 성전에서는 로마의 화폐에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서 일반 화폐를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전에서 통용되던 ‘티리쉬’라 불리는 성전화폐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화폐를 환전해주는 환전업자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들은 상당한 수수료를 챙겼습니다. 성전에서 환전을 하는 것은 커다란 수익을 챙길 수 있는 독점 사업이었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비둘기 파는 자들까지 제사장들에게 자리세를 주며 여러가지 부정 부패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이 모든 사람들을 다 내어쫓으셨습니다. 16절에 보면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기구’란 돈 바꾸는 자들의 table, 비둘기 파는 자들의 Chair, 돈을 담는 그릇과 같은 장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 하셨습니다.

본래 성전을 지은 이유는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3절에 보니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만민이란 말 그대로 모든 민족이란 뜻입니다. 유대인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13절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56장 7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집의 기능과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주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 입니다. 또한 성전은 기도를 위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시장바닥, 강도의 굴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행위는 성전의 본래 기능을 상실케 했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닌 부당한 이득을 갈취하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성전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될 때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날 헤롯 성전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디서 기도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성전입니까? 아닙니다. 신약성전에서 성전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거합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곧 성전 입니다. 따라서 오늘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곧 성전인 우리 마음 속을 정결케 해야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물들어 회복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속한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가 정결해지려면 각각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 물질주의, 세속주의로 물든 곳이 있다면 과감하게 모두 정리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을 세속주의로부터 멀리하고, 만민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시는 주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왕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며 찬양하자, 무리 가운데 섞여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저들을 꾸짖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나 메시아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부인하고 있는 예수님을 메시아고 왕이라고 부르며 찬양하는 소리가 듣기 싫고 거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일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절을 봅시다. “[21: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모두가 기뻐하는 이 때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과 사람들을 책망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러한 요청을 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백성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반응은 신성모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정할 뿐 아니라,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님을 예수님 스스로 밝히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진정한 왕은 로마 황제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부르며 민란이 일어날까 했던 것이죠.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책망하라 부탁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하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드리는 백성들의 찬양과 영광은 합당한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제자들처럼 그 분을 찬양하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대적하고 부인하든지 입니다. 이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예수님을 기쁨과 찬양으로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또한 그 분을 우리 인생의 진정한 왕으로 좌정하시도록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요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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