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0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요한복음 4장 11-26절)

우리 몸이 하루 필요로 하는 수분 섭취량은 2.5L 정도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섭취하는 물의 양은 평균 약 1.3L로 매우 부족합니다. 사람들은 가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필요한만큼의 물을 마시지 못했을 때 느끼게 되는 육체적인 갈증이 있는가 하면, 우리 내면에서 겪고 있는 영적인 목마름, 영적인 갈증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은 영적인 목마름을 겪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이 사는 곳은 사마리아라는 도시였고, 통상 우리는 이 여인을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고, 식사 교제는 물론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유대인들로 하여금 사마리아인   들을 혐오하게 만들었을까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 남방 유다 왕국으로 나뉘어집니다. BC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하게 됩니다. 이 때 앗수르는 북방 이스라엘 민족들을 포로로 잡아 잡아가 다른 땅에서 살도록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 동시에 다른 땅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황폐한 북방 이스라엘 왕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후 새로 이주한 이방인들과 기존에 남아 있던 북방 이스라엘 왕국 사람들은 서로 혼혈하게 되고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순수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방인들과 혼혈로 인하여 섞여 버린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따라서 순수 혈통, 순수 아브라함의 후손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던 남방 유다 사람들은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을 혐오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쳐 가야 합니다. 통상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로 직접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마을에 들어가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정오가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햇빛이 강한 중동 지역입니다. 따라서 하루 중 햇볕이 가장 강렬한 정오에는 우물에 물을 뜨러 가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나, 해가 뉘엿 지는 늦은 오후가 되어야 우물에 와서 물을 뜨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우물가에 기대어 앉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양식을 사기 위해서 성으로 들어갔고, 예수님만 우물가에 남아 계셨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을 떠 자신에게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이 당시 남자는 동반자가 없는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낯선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은 여자였기 때문에 이 여자와 예수님의 만남은 더 이상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찾지 않는 뜨거운 정오의 우물가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뜨기 위해 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하루 중 가장 더운 정오에 우물에 왔다는 것은 그가 사회에서 멸시 당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로 아무도 우물가를 찾지 않는 정오를 일부로 선택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마실 물을 달라고 여인에게 청하자, 놀란 사마리아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자의 물동이가 더럽고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에게 물을 달라 요청하는 유대인 청년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진 것이죠.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만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예수님께 생명의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여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는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께서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란 일반적으로 [흐르는 물]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 길을 그릇도 없었고, 심지어 그 지역에는 흐르는 물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선생님 이 우물을 우리 조상 야곱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대대로 우리 조상들과 자녀들 그 가축까지도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물을 구하겠습니까? 선생님이 우리 야곱도다 더 위대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여인에게 주고자 하는 흐르는 물, 생수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은 차원이 나른 물이며, 목마름을 영원히 해갈해주는 생명의 물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이 생수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 안에 있는 성령이며, 그들 안에 주어진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으로 그 마음을 채운 사람들의 영혼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정말 그런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그 물을 주어 다시는 이 뜨거운 정오에 물을 뜨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 주기를 원하셨으나, 아직까지 그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녀에게 이 생수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만족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우리를 참 만족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예수님이 없이는 만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정오의 시간 우물을 찾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마치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내면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인터넷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기사와 가십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광고들을 보면 우리는 그 제품이 없어서 불행하고, 그것을 가지면 우리가 참 만족을 얻을 것처럼 약속합니까? 우리가 끝없이 인터넷 속에서 스크롤을 올리는 이유는 만족할 수 없는 갈증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면 속 갈증을 해소해 줄 그 무언가를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우리 마음 속 자리잡은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영적 갈증을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 때 갈증은 해갈되며, 참된 영적 만족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먼저 죄를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가장 감추고 싶었던 그녀의 삶을 터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생수에서 남편으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는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지시하심으로써 그녀의 삶에 채워지지 않는, 채울 수 없었던 갈증의 문제를 지목하셨습니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시에 그 여인은 놀라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하고 둘러댔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사람은 아마도 그녀가 과부이거나 결혼한적이 없는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 여인의 이전 결혼 경험과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바로 말하였다” 1세기 유대인 랍비들은 여자가 결혼할 수 있는 회수를 최대 2회, 특별한 경우 3회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결혼을 무려 5번이나 하였고, 현재는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의 현재 삶을 인정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그녀의 괴로움과 영적 갈증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 된 삶에 진리로 대면하셨습니다. 여인은 아무것도 예수님께 실토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 또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살아온 삶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죄를 대면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도 동일함을 보여줍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악과 현재의 죄들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러한 죄들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하고, 죄를 지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기는 커녕 죄로 인해 벌을 받을까 두려운 것이죠. 이 사마리아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여인이 결혼을 5번이나 하고, 이혼을 다섯 번 하고, 또 다른 남자와 동거 중입니다. 이 여인이 겪은 기가 막힌 사연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누구에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서 숨어 지내던 여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여인이 길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수군수군 거리며 뒤에서 욕했을 것입니다. 뜨거운 정오에 우물가에 나온 이유도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처음 만난 예수님께도 자신의 치부와 지난 날의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가 감추려고 한 지난 과거와 죄를 정면으로 대면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사함과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맡기고, 죄사함을 구하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을 은혜로 받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신에게 버림 받고,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못할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은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지나온 삶을 정확하게 말씀하시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이심을 인정함으로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하나도 틀리지 않게 보셨음을 시인했습니다. 분명히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현재 남편 없이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삶의 모습은 그녀에게 다루기 불편한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배를 위한 온전한 장소로 대화의 주제를 돌렸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처음 제단을 쌓은 세겜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리심 산을 예배 드리는 적합한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간 모리아 산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이 예배 드리기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적합한 장소는 언제나 거친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치부와 잘못을 드러내는 주제로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신학 논쟁으로 주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도 사마리인들도 그들의 전통적인 장소에서 예배드리지 않는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 장소에 대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논쟁이 곧 쓸데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위치나 장소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배 드리는 자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사 그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올 것을 자신도 확신했으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때 예수님께서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하고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재판을 받으실 때를 제외하고 성경에서 이처럼 직접 “내가 그리스도다!”하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밝힌 것은 오늘 본문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이 사마리아 여인도 간절하게 기다려온 메시아, 그리스도가 곧 자신임을 밝히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간절히 찾던 것,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한 해 무엇을 찾기 위해서 그토록 숨가쁘게 쉬지도 못하고 열심으로 살아왔습니까? 돈이었습니까?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었습니까? 갖고 싶었던 어떤 물건이었습니까? 세상에 이르고 싶었던 어떤 삶의 모습이었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참된 만족은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물이 될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영적 만족은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며,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님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