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수도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 동편으로 도망치려고 합니다. 이 때 제사장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이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압살롬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신정국가 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압살롬이 왕위의 정통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과 함께 있다면 다윗 진영이 왕위의 정통성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에 수월해 집니다. 우리 편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떠나는 것이 모로 봐도 유익한 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25절을 보니, 다윗이 제사장 사독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 성읍 안으로 도로 들여놓아라. 여호와 앞에 내가 은혜를 입었다면 그분이 나를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궤와 그분이 계시는 곳을 다시 보여 주실 것이다.” 26절 “그러나 그분께서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하신다면 내가 여기 있으니 그분이 보시기에 선한 대로 내게 행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광야의 길로 나가는 자신의 고된 여정에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궤가 함께 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언약궤는 수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자신의 안위만 따졌더라면 뒤도 안 보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달아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영광을 더 생각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급한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고생길, 도망길에 오른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도깨비 방망이처럼 이용하려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도구화 하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명예 입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유익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명예를 더욱 가치 있게 생각하고 그 길을 선택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성읍으로 복귀 시켜 주셨고, 다시 왕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높여 주신다는 영적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잠언 8장 1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광야로 가지고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읍에 다시 돌려보낸 다윗이 바로 이러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았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피난의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그에게 소식이 들려옵니다. 31절을 보면 압살롬과 모반을 일으킨 사람들 중에는 ‘아히도벨’이라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길래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일까요? 삼국지를 보면 촉나라 유비에게 제갈공명이라는 천재적인 모략가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군사를 가진 위나라의 조조도 몇 번씩이나 제갈공명 때문에 전쟁에 크게 패했는지 모릅니다. 유비와 그의 장수들이 제갈공명의 말만 다 따랐어도, 천하가 유비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제갈공명은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삼국지 유비 시대에 제갈공명이 있다면, 다윗 시대에는 아히도벨이 바로 천재적인 모략가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죽을 때까지 유비에게 충성을 다하였건만, 왜 아히도벨은 갑작스럽게 압살롬에게 돌아선 것일까요?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이 간음했던 여인 밧세바의 친 할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아히도벨이 볼 때 다윗은 친손녀의 가정을 무너뜨린 간통남인 셈입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간음 사건의 진상을 알고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때마침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 이 참에 압살롬의 진영에 붙어서 다윗을 없애 버리려고 한 것이죠. 다윗의 간음죄가 낳은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십시오. 이처럼 죄악은 무수히 많은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고, 우리 삶을 고난과 위기로 몰아 넣습니다.
31절 후반부를 보면 천재적인 모략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 진영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급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아히도벨의 계획을 어리석게 하소서.” 때마침 다윗의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아렉 사람 후새가 등장합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역시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습니다. 다윗은 후새를 보내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후 다윗의 은밀한 명령대로 후새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버립니다. 그래서 다윗이 살아남게 됩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구사일생]이란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습니다. 패할 것 같은데 패하지 않습니다. 신기하죠?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나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죄의 대가는 무시무시합니다. 인간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 삶을 큰 위기로 내몹니다. 셋째로, 설령 죄의 대가로 하나님께 무시무시한 벌을 받고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또 다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