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의 스승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잡아다가 무서운 형벌에 처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하시던 밤 이미 뿔뿔이 흩어져 제 각기 피신한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예수와 함께한 선동자로 간주하여 체포할 것이란 생각에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은신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 문맥을 한 번 살펴봅시다. 17절 말씀을 보시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고, 주님과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증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주장해도,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너무도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마리아의 부활의 증언을 믿었더라면, 오늘 이렇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고, 그로 인해 세상적인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 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 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기에 세상의 근심과 염려,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 앞에서도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제자들은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굳게 닫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 공간에 누가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문을 열지 않은 채 들어오셨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광스러운 변화로 인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6절 말씀을 보시면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공간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들어오시는 장면이 또 한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신 새 몸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육신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언했음에도 그녀의 말을 거짓으로 생각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셨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어떤 이들은 너무 놀라 비명이나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에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을까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했을까요? “베드로 너 왜 나 부인했니? 야고보 너 어떻게 나를 두고 그날 밤 도망 갈 수 있니? 마태야, 너는 어쩜 내 무덤도 한 번 찾아 오질 않았니? 빌립아, 내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우리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자신을 버리고 배신한 제자들에게 묻고 따지고 책망하고 싶은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첫 마디는 책망이나 비난이 아니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금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고, 문도 굳게 잠그고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평화’의 인사말을 건내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평강’이란 단어가 헬라어로 ‘에이레네’란 단어인데 히브리어로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란 단어 입니다. 샬롬은 마음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그의 존재를 믿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귀신을 보는 것인가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에 쌓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못 박혀 구멍 꿇린 자신의 두 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른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계신 분이 참으로 예수님이신 줄 알아 보았습니다. 자, 여기서 제자들의 심경의 변화를 한 번 봅시다. 좀 전까지 예수님이 죽으신 줄만 알았던 제자들의 감정은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과 염려 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자 그들의 심경이 어떻게 변화합니까? 20절 말씀을 봅시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자, 여기서 제자들이 느낀 기쁨의 정도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환희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전에 갖고 있던 염려와 두려움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한 번 그들을 위해 평강을 선포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이 샬롬, 평강과 함께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에게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그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마음 속 염려와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죽음과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이제 그 무엇이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신데 그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의 증인 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하루도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명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