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며 그를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며 그 과정을 통해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이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의 억울함을 풀어주는데 앞장서기 보다는,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내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에 얽히기를 귀찮아 했고 동시에 유대인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압력에 굴복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도록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의 고백을 통해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한 본디오 빌라도의 악함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놓아줄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본문 39절 말씀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라는 이름대신 ‘유대인의 왕’이란 말을 사용하여,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는 것이 몹시도 꺼림직 했습니다. 이에 40절 말씀을 보면 몹시도 화가 난 유대인들은 크게 소리지르며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결국 유월절 전례에 의해 바라바가 풀려나게 되었고, 예수님은 죄수의 신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 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말한 것을 조롱하며 그의 머리에 가시로 엮어 만든 왕관을 씌웠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예수님 앞에 서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조롱하며 그를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9장 3절에 기록된 ‘손으로 때리더라’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해석해보면 한 차례 때리고 끝난 것이 아니라, 군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채찍질만 하고 놓아주려는 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채찍질 당하신 예수님께서 가시로 된 왕관을 쓰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고 나타나자, 성난 군중들은 더 크게 분이 났습니다. 안 그래도 나사렛 예수가 자신들의 왕이라 주장하여 분노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의 몰골이 마치 자신들을 조롱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 입니다. 요한복음 19장 6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처형을 거부 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다고 고발하며, 율법에 따르면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따금씩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찾아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혹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온 신은 아닌지 두려워했던 것이죠.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2번째 심문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9절 말씀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어디서 왔느냐?” 물으며 그 분의 기원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이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하고 묻는 간접적인 질문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빌라도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침묵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라고 대답한다면 두려움에 쌓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대로 놓아줄 수도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기원을 묻는 빌라도에게 침묵 하신 것이죠.
침묵하는 예수님을 향해 빌라도는 자신에게 예수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대답을 종용 했습니다. 그러자 11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빌라도가 가지고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임을 밝히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처형하는 빌라도의 죄보다 자신을 그에게 넘겨준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은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하고 물어보았던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 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떠한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판장으로서 공의를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보호해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수님을 채찍질 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의 마음이 차지 않자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 당하도록 내주었습니다. 그는 정의를 따라 재판하지 않았고,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 했습니다. 그 자신의 말대로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옳은 길을 버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사람이 두려워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자신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 진리를 버리진 않았습니까? 사람과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