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종의 형체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 주님께는 흠모할 만한 그 어떤 고운 풍채와 아름다운 모양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하고 기대해왔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맘에 들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53장 3절에는 그가 ‘멸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외면한 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적대적으로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 맘에 들지 않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미워하여 예수를 버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이스라엘 백성 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멸시하고 배척한 것이죠. 더 안타까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멸시와 천대는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과 모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3절 말씀을 읽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그래도 이 사람들과는 달라. 적어도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을 멸시 한 적은 없어.”하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를 공개적으로 부인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자신이 예수를 멸시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 자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다는 것은 예수 없이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삶 자체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 입니다. 죄로 인해 쓰레기와 같이 더럽고 쓸모 없는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손 내밀어 주신 주님…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열렬히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나의 그 귀한 예수를 멸시하고 모욕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 대속의 공로에 대한 아무런 감격도, 감사도, 감동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러한 신앙생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 입니다.
우리 안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격이 살아 있습니까?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가슴에는 예수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삶의 기반이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보다 세상의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모르기 때문 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 입니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섬김에 헌신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며, 남들 보다 조금 더 거룩한 삶을 산다는 자신의 알량한 도덕적 생활에 긍지를 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지’하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있는 것 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나야말로 자기의에 빠져 예수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는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이 가슴 속에 구원의 감격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불꽃이 흔들리다 꺼져 버린 것과 같이, 세상 풍파 속에 살다 보니 어느 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불꽃을 지키기 위해 두 손으로 지키듯이, 구원의 점검이 꺼지지 않게 하십시오. 이 시간 세상 풍파로 꺼져가는 영혼의 심지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구원의 감격이 훨훨 타오르게 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악한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모습 입니다.
다시 성경 말씀을 보세요.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간고’란 단어는 ‘고통’, ‘슬픔’, 그리고 ‘아픔’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주님 앞에 나오는 영혼들을 품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다 당하시고 자신의 삶을 슬픔과 아픔에 내어 주셨습니다. 죄의 고통, 가난의 슬픔, 육체적 아픔을 주님은 겪으셨어요. 3절에 ‘질고’란 단어는 ‘질병’, ‘연약함’을 말합니다. ‘질고를 안다’는 말은 예수님도 육체 가운데 있는 동안에 질병을 앓고 있었고, 그 모진 고통을 몸소 당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따금씩 어떤 분들은 병상에 누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뭘 알아? 예수님이 나처럼 이렇게 병들어 아파 본적 있으신가? 예수님도 내 이 힘든 마음 모를거야.”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분이세요. 어떻게요? 주님도 고통을 당하셨거든요. 주님에게도 질병과 연약함이 있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몰라준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아세요. 주님은 가난의 고통, 질병으로 인한 좌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감… 우리 주님은 그 마음 다 이해하실 수 있으세요. 왜요? 주님은 몸소 다 겪으셨어요.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 주님은 인생의 고통이 무엇인지, 그게 얼마나 괴롭고 힘든 것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세요. 그리고 우리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3절 말씀 이어서 봅시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워서 그 분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보기 싫어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혹시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시’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무시 당하는 것만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한국의 어느 시장 구석에서 조그마한 생선가게를 하는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온 몸에 생선 비릿내가 냄새가 다 배어 있습니다. 생선가게 하다 보니 화장은 커녕, 머리 손질할 시간도 없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어머니는 자기를 위한 옷 한 벌 사 입을 여유도 없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잘 자라는 것 입니다. 아들은 엄마에게 세상의 전부나 다름이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시간까지 진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생선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저 반대편에서 그토록 하루 종일 보고 싶던 아들 녀석이 친구들과 걸어오고 있습니다. 반가워하는 어머니와 다르게 아들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깔깔대고 웃는 친구 틈바구니 속에 숨어 아들은 어머니를 못 본 척 지나갔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어머니도 그대로 아들에게 아는 척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 무리를 지나갔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에요. 하루 종일 장사하는 어머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겠죠. 온 몸에 생선 비릿내 나는 사람이 엄마라니 부끄러울 수도 있겠죠. 그래도 하루 종일 온 몸이 부셔져가랴 일하고, 남들에게 ‘죄송하다’ 허리 숙여 인사하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 버려가며 살아왔던 이유는 바로 이 ‘아들’ 녀석 때문이었는데… 그 아들이 엄마가 부끄럽다고 어머니를 못 본채 무시하고 친구들 틈바구니 속으로 숨어 지나가니 어머니 가슴에 스며든 섭섭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날 어미니 가슴에 물든 아픔이 얼마나 오랫토록 시리고 시렸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마다 얼굴을 돌리며 그를 외면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처럼 고통을 다하시고 질병을 앓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들 때문인데,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고 멸시했어요. 예수님을 완전히 무시해버렸어요. 주님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큰 고통으로 그 분의 가슴이 찢어졌을까요?
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갖 고난과 슬픔과 질병을 다 당하셨습니다. 어제 새벽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이 이렇게 약하고 못난 모습이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를 못한 거에요. 자기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도무지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무시해 버린 거에요. 생선 파는 어머니가 부끄러워서 고개 숙이고 외면한 아들처럼, 예수님을 향해 얼굴을 가리고 그를 멸시해버렸어요.
오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의 클라이막스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3절 말씀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3절의 마지막 다섯 단어만 읽어 봅시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좁게는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포함하여, 넓게는 우리 모두를 포함 합니다. “아니요, 목사님 저는 단언코 한 번도 살면서 주님 무시한 적 없습니다!” 정말이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저와 여러분도 다 주님을 무시했다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자기의’와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육체적 욕심’과 ‘세상의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삶… 이 모든 것이 예수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들 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한 번만 강하게 경험하고 사라져 버리는 ‘단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또한 구원의 감격은 ‘과거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은 ‘단회적’이 아니라 날마다 ‘반복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은 ‘과거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의 감격이 과거의 한 순간에 소실되어버리는 것이었다면, 현재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에는 아무런 감동도 감사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십시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예수를 멸시한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우리가 예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과 같은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사, 그 큰 고통을 당하시고 가난과 질병의 아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다 짊어 지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저와 여러분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닫는 것이 필요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할지라도, 모태 신앙으로 오랜 시간 동안 교회생활을 이어가고 있다하더라도, 큰 헌신적인 삶으로 신앙의 자랑거리가 많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는 한 그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공허한 나무일 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그리스도께 매여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하루도 새로운 십자가의 감격을 가슴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