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3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한복음 11장 32-44절)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의 임종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중한 질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힘 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나사로, 그 모습을 곁에서 아무런 도움도 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깊은 슬픔과 큰 고통에 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큰 아픔 가운데서도 이 두 자매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의견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곳에 게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탠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둘 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베다니로 즉시 오지 않으시고 지체하신 점에 대해서 대단히 섭섭해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렸건만, 주님이 오시지 않고 사랑하는 오라비가 죽자 이 두 자매는 낙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베다니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 입니까? 모든 병자들을 능히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몇 일만 조금 일찍 오셨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탠데… 아쉬움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각각 주님께 나아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고 말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 원망 섞인 목소리는 고통스럽고 부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상황 속에 처한 우리들의 목소리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 두시는 걸까?” 이런 질문이 끊임없이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갈수록 악화되는 건강이나 상황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입니다.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단숨에 없애 주시지 않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이유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가지 사실만큼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 극심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고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슬퍼하며 울고 있는 마리아 곁에는 함께 울고 계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십니다. 3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통’이란 감정은 분노에 가깝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의 결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와 인간을 이처럼 슬픔에 처하게 하고 고통 당해야 하는 상황을 보시며 예수님은 매우 안타깝게 여기시며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이들 중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우면 그렇게까지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이 진리를 바꾸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 이제 성경은 아주 놀라운 장면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고통을 공감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을 공감할 수는 있으나, 거기까지 입니다. 고통의 근원을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두 자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능력을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많은 사람들도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할 초월적인 존재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도 엄청난 사건이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생명과 단절이라는 이 저주를 과연 예수님께서 해결할 수 있을지 사람들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정복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이들은 엄청난 대륙을 정복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정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십니까? 예수님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망을 굴복시킬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시체가 안치 되어 있는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이 일에 반대 합니다. “예수님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벌써 시체 썩은 냄새가 무덤 밖으로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무덤 문을 열라고 하시다뇨?” 마르다는 예수님께 어떤 권세가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죽은 오빠가 살아나는 것보다 더 간절한 소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을 예수님께서 능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가 놓여 있는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요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기도가 다 마친 후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에 나사로는 마치 미라가 붕대로 꽁꽁 쌓여 있는 것처럼 온몸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이 광경을 우리가 보았다면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광경을 본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놀라움 그 자체 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 어떤 문제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보호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란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 오직 한 가지 ‘믿음’을 요구하신 것처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 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란 확신으로 살아가는 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변함없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