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2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 (요한복음 7장 19-24절)

모세의 율법에는 총 613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 중 ‘무엇을 해라’는 긍정문은 248개, ‘무엇을 하지 말아라’는 부정문은 365개 입니다. 사실 이 613개의 조항들을 사람들이 일일이 다 지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인간이 다 이룰 수 없기에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키시기 위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지심으로 못 박혀 죽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율법 준수의 의로움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 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복음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모세의 율법을 모두 준수하여 의로움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을 향해 가진 열정이나 율법 준수를 위한 근면 성실함은 존중 할만 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자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의로움을 얻어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은 참으로 어리석고 헛된 일 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대로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이 하나도 예외 없이 온전한 율법 준수에 실패 하였으며, 따라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받은 모세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613개의 계명 외에 수많은 추가 조항들을 만들었고 장로들의 유전이란 이름으로 내려옴으로써 그러한 전통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고 심판 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법이,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변질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까지 준수하려고 해온 유대 지도자들이 볼 때,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은 이단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라면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해 병든 자를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요일에 고쳤을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더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장님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 씻어 다시 보게 고쳐주신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참고로 유대 지도자들은 38년 만에 병이 난 이 사람을 보고 안식일에 병들어 누워 있던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38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두 다리로 걸었던 이 병자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 이들이 얼마나 율법 준수에 눈이 멀어 율법의 정신은 보지 못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 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정면으로 비난 하셨습니다. 19절 입니다.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예수님의 이 평가를 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평생 율법 준수를 위해 목숨을 걸 듯 살아왔는데, 예수님께서 저희 중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 하셨을 때 이들은 이를 갈고, 속으로 분을 내며 예수님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기초가 되는 자비와 은혜의 정신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이 결코 율법 위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태어난 지 8일 되는 사내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22절 입니다. “(요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태어난 지 8일이 되는 사내 아이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8일 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라면 본래 안식일의 계명에 따라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 안식일에 할례 받는 것은 괜찮다고 해석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위의 예를 통해 유대인 스스로도 안식일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는 모순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23절 입니다. “(요 7: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할례라는 계명을 준수하기 위하여 안식일에도 일을 하거든, 하물며 38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하나님의 자녀가 치료를 받고 자유함을 얻기 위해 안식일에 고침을 받는 일이 어찌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일이 되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의 일 입니다. 그곳에는 무려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병마에 시달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허리가 굽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병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얹으시자, 그 즉시 여인이 똑바로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병을 고치신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찬양 했을까요? 아닙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고 화를 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을 나무랐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끌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하지 않느냐? 그런데 이 여자는 아브라함의 딸로서 십팔 년 동안, 사탄에 매여 있었다. 안식일에 이 사람의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중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오늘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외형적으로 율법 준수라는 가치에 더 관심을 가지지 말고, 왜 율법을 준수하려고 하는지, 본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외모로 예수님을 판단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새벽예배 매일 나오냐 안 나오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정말 매 순간 하나님을 믿고 붙들고 주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다독하고 체크리스트에 줄 긋고 연말에 상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삶 속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태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하며 유대인들처럼 다른 이들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외적인 면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 담긴 본질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말씀 보는 것, 예배 하는 것,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정말 내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