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4 나는 쇠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 (요한복음 3장 22-30절)

본문 속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유대 땅에 머물고 계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절을 볼 때,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자 모여 들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웬일인가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발길은 줄어들고, 예수님께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인원이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전에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선생님이 증거하셨던 그분이 지금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분께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보고를 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의 스승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시사철 많은 손님들로 분주한 과일 가게 주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전국적으로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 과일 가게도 몇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곳에 또 다른 과일 가게가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 기존 과일가게를 찾던 손님들의 발길은 줄어들고, 새로운 과일가게는 많은 손님들로 붐비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과일 가게 점원이 사장님에게 달려와서 “사장님, 이거 보세요. 사람들이 다 저 새 과일가게 갑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가게는 안 오려나 봐요. 우리 이대로 가면 가게 문 닫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는 건가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과일 가게 직원처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반대로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신도시 하나가 건설 되면 수십 개의 개척 교회가 함께 세워진다고 합니다. 어느 신도시의 경우, 새롭게 들어설 편의점의 숫자보다 교회 숫자가 더 많아서 이슈가 된 적도 있습니다. 도시에 새롭게 인구가 유입된 이후, 시간이 조금 흐른 후 개척 교회 목사님들 인터뷰를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교회가 없어서 개척 교회 오던 성도님들이, 어느 날 근처에 들어선 대형교회로 옮겨갔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대형교회들이 신도시 들어오면 개척교회는 큰 타격을 받는다고 한탄해 하는 목사님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또 다른 교회가 옆에 들어오면 신경 쓰기 마련 입니다.
그럼 세례 요한의 반응은 어떠 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정도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인정 받는 자였습니다. 그런 인기 가도를 달리던 세례 요한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를 찾아오는 지지자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 그 인원이 고스란히 나사렛 청년 예수를 따르는 곳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과일 가게 점원처럼 “난 망했다. 예수만 없었어도 내가 이스라엘 최고의 인기쟁이 선지자였을탠데” 했을까요? 아니면 대형교회 때문에 교인들을 잃었다고 한탄하는 개척교회 목사님들처럼, 예수님 때문에 자기의 명성과 인기에 타격을 입었다고 한탄 했을까요? 아닙니다.
27절 말씀을 봅시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 요한은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렇게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람들을 붙여 주셨기에 일어나는 일이란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왜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요 3: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임을 다시 한 번 밝히며, 자신이 예비한 메시아가 곧 예수임을 암시 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는 것을 증거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라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된 것을 보며, 어쩌면 흡족한 마음에 빙그레 웃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자기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결혼식장에 가면 신부를 취하는 사람은 오직 신랑 한 사람 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랑의 가까운 친구들은 함께 기뻐합니다. 신랑이 결혼하는데도 친구는 함께 웃고, 즐기며 이따금씩 신랑 신부를 위해 박수도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랑의 기쁨이 곧 자신들의 기쁨이기 때문 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러한 비유를 들어 예수님께서 잘 되시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 임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 참 멋있는 사람이죠? 이런 친구를 둔다면 참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30절에 세례 요한은 말했습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말을 원어에서 직역해 보면 “그 분은 커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감소되어야 한다.” 입니다. 세례 요한은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이 돋보이기 위하여 신랑의 친구는 들러리가 되어주는 거처럼 그리고 그러한 섬김을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흥하기 위하여 자신은 쇠함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고백 했습니다. 오늘 이러한 세례 요한의 고백에는 기쁨이 실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 역시 세례 요한과 같은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내가 흥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희생하고 주님께 드리는 삶을 선택하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기쁨을 부어 주십니다. 또한 주님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을 경험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만 온전히 흥하게 되는 기쁨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