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자기 진단에서 실패한 교회 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의 상태를 잘못 진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태가 심각한데도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온 몸에 암세포가 전이 되어서 암말기환자인데 이것을 모르고 몸에 열이 나고 통증이 있어도 잠시 후면 지나갈 독한 감기라고 생각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야 교회의 잘못된 영적 자기 진단을 책망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안약이 유명한 도시었습니다. 그래서 먼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이 도시에서 나온 안약을 사러 오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눈을 고치는 약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에 위치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17절에 “너희가 눈이 멀었구나”하고 말씀하시고 18절에 “너희야말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 그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사였으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들릴라가 적이 왔다고 그를 깨울 때 잠에서 깬 삼손은 “내가 이전처럼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했으나, 이미 성령은 그를 떠나셨습니다. 삼손의 가장 큰 비극은 주님의 영이 그를 떠났는데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이들은 주님이 그 교회를 떠났는데도 이 사실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적 자기 진단에 실패한 것이죠.
함께 본문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전도 할 때 쓰이는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불신자를 향한 글이 아니라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전도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집 안입니까? 아니면 문 밖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잘나가는 교회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예수님은 교회 문 밖에 서 계셨던 공동체 입니다. 20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어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여기서 두드린다는 말은 헬라어로 현재형 입니다. 즉 한 번 두드리고 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문만 두드리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개야 내 마음의 문을 열어다오. 내가 여기 있어. 너의 수치와 죄를 씻어주기 위해 내가 왔어. 너는 부요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야. 너는 지금 가난하고 비천하고 불쌍하다. 이 문을 열어다오. 내가 들어가 함께 살 때 비로소 너의 죄와 수치가 사라질 것이다.”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실 때 우리는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이 끊임없는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너 스스로 인생을 살려고 하고 있구나? 나를 네 안으로 초대해 다오.” 우리 주님은 힘으로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인격적이신 분이기에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밖에 서서 기다리십니다. 관계는 강제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 문을 열어야 합니다. 20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과 그 사람과 식사 교제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한 식구가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차린 음식이 초라할지라도, 내 인생이 보잘 것 없을 지라도, 주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함께 먹는 순간 그 날은 우리 인생 최고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입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을 내 삶 밖으로 밀어낸 것은 아닌지, 안방에 거하시던 예수님을 사랑방으로 뜰 밖으로 문 밖으로, 내 삶과는 전혀 상관 없는 분으로 여기며 바쁘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를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20절 말씀은 “누구든지..”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 즉 단체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구성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의 마음 문을 대신하여 열어줄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노크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하고 말해줄 수는 있겠으나,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 문을 대신하여 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실 것인지, 아니면 여태까지 살아온대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것인지. 선택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예수님과 교제를 나눈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맛 볼 수 없는 최고의 만찬으로 참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양모가 유명한 도시었습니다. 뉴욕과 파리가 패션도시로 알려진 것처럼 라오디게아 도시에서 생산되는 양모는 로마에서 알아주는 품질을 자랑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전자기기 하면 삼성 있으니까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시민들 역시 이 도시의 양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 도시에 살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너희가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의미의 옷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힘과 부를 의지하였습니다. 스스로 “우리는 정도면 괜찮지”하는 자부심으로 옷 입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이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벌거벗었다.” 고 평가하십니다. 어렸을 적 읽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갔지만, 모든 이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자부심만 있었지 실상은 수치를 당하는 교회였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안고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로 덧입는 사람은 그의 죄와 수치가 가리움을 받습니다. 사회에서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서 죄값을 치르고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출소한들 그의 신분 기록에는 범죄자라는 기록이 늘 따라다닙니다. 이러한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셨다는 사실을 대할 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사실은 믿지만 여전히 우리가 죄를 지은 Record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은 그 모든 기록까지 함께 가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아무리 지난 날 지은 죄의 조각을 찾으려 해도 작은 흔적 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 놀러 가면 해변가에 있는 돌멩이를 가지고 바다를 향해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지금 내가 던진 그 돌멩이를 찾아오라고 한다면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가라 앉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물에 빠진 돌은 다시 떠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가 마치 이 깊은 물에 빠뜨린 돌과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주어 오려 해도 어디 있는지 어떻게 주어 올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죄가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노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잊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죄를 우리가 가슴에 꽁꽁 품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미용실에 가서 자른 머리는 휴지통에 버리고 주워 담아오는 사람이 없듯이, 교회 와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잘라낸 죄는 다시 주워 담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옷 입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죄로 인해 벌거벗은 몸과 같이 드러난 수치가 그리스도라는 의의 옷을 통해 덮어집니다. 우리 죄와 수치가 사라지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길밖에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