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8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나니 (요한복음 15장 1-8절)

포도나무는 성인 남자 보다 조금 더 키가 큰 나무입니다. 높이가 20-30미터가 넘는 나무들을 생각해보면 포도나무는 매우 크기가 작은 나무 입니다. 포도나무는 이름은 나무이지만, 사실 덩굴처럼 뻗으며 자라갑니다. 그래서 주변에 나무 막대기를 꽂아주어 포도나무의 덩굴이 자라가게 합니다. 비록 키가 크지 않지만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잘 자란 포도나무 열매는 보기만 해도 탐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고, ‘참’ 포도나무 입니다. ‘참’이란 말은 흠 없고 상처 없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의미합니다. 이런 나무에서 자라는 열매는 얼마나 그 질이 좋겠습니까? 게다가 이 포도나무를 키우고 계신 농부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러니 이러한 포도나무에 접붙임 바 된 가지는 자연스럽게 싱싱하고 최상품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가 생겨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가지들은 겉으로 보면 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같으나, 이미 속은 말라 썩어 죽어버린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죽어버린 가지들은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하여 버리십니다.
오늘 이 비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 보면, 매주 교회 다니고, 열심히 봉사하고 남보다 열심히 교회 생활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그래서 육안으로 보면 여전히 살아 있는 가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이미 말라 죽어버린 가지처럼,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져 영혼의 생명이 점차 말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다고 다 살아있는 가지는 아니듯이, 교회에 붙어 있다고 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늘 점검해야 합니다. 과실을 맺지 않은 나무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는 이 두려운 경고를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었으나 열매 맺지 못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살았습니다. 그 어떤 가지보다도 더 큰 열 두 가지 중 한 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다를 통해 아름다운 열매들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앙상히 말라버린 썩은 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라는 가지는 참 포도나무에서 제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과를 키우는 농장에 가보면, ‘적과’ 혹은 ‘열매솎기’라고도 말하는 과정을 합니다. 사과가 아직 다 자라지 않고 한 엄지 손가락 만 할 때 보면 한 가지에 사과가 여러 개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농부 아저씨가 그 중에 가장 큰 열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가위로 잘라버립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에 열매가 너무 많으면 나무의 영양분이 나눠져서 상품 가치로는 별로 좋지 않은 고만고만한 사과 열매만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의 영양분을 잘 자랄 수 있는 사과에 갈 수 있도록 나머지 과일을 솎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과’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해 버리는 것도 바로 이런 ‘적과’의 개념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농부 입장에서 볼 때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가지는 정말 쓸모가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워낙 약해서 목재로 쓸 수도 없습니다. 액자를 벽에 걸 때 쓸 나무 못으로도 사용이 불가 합니다. 그러니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는 땔감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참나무처럼 오래 타는 것도 아니고 금방 타 없어져 땔감으로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열매 없는 포도나무 가지는 쓸모가 젼혀 없는 골치거리 일 뿐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포도나무 가지에 둘 이유가 없기에 가지를 제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려고 2절 후반절에 보니, 이를 “깨끗케”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케 한다는 표현은 나무를 물로 씻어주고 수건으로 박박 닦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쓸모 없는 가지들을 다 잘라내는 ‘가지치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래 다른 가지에게 가려고 했던 영양분까지 이 가지에게 흘러가 더 크고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은 가지 중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 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딱 붙어 있는 살아 있는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부터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첫 열매는 매우 더디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열매 맺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영적 양분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었는지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일루리곤, 로마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런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물과 양분을 통해서만 가지는 살 수 있으며 또한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루 하루 살아갈 수 있으며 그 힘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 맺는 삶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여기서 열매란, 비단 전도의 열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통해 얻는 여러가지 유익함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의 남기신 사역을 계승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며,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 이 모든 것 또한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들 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열매 맺는 삶의 가장 큰 축복은 매일매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깊은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4절에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주님은 일회적인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평생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단인 구원파 같은 경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을 때 했던 회개도 진실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더 이상 무언가 더 해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하고 해석합니다. 구원파는 성화의 삶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번 구원 받았으면, 그 구원이 너무도 확실해서 남은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의 거짓된 교리가 그러한 삶을 지지합니다.
엄마 뱃속에 있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지난 열 달 동안 저 품고 계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또 어머니 고생 시키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스스로 살아 보겠습니다.” 하고 어머니 품을 떠나 살겠다고 우격다짐하면 그 아기는 보나마나 오래 못 가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원받고 거듭난 것은 지금 막 새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고 신앙이 완성 된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진짜 모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따라가며 내 영이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것은 “구원 받으라! 한 번 구원 받았으면 모든 것이 완성 되었다!”하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이 명령은 지금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 자들에게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계속해서 나의 안에서 거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일회적인 ‘구원 사건’이 아니라, 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성화의 삶’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악의 영향으로 죽어 있는 고목, 즉 죽어 버린 나무에 살던 가지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말미암아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접붙임 바 된 가지들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4절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후에는 이런 말씀을 이어서 하셨습니다.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힌트를 7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그것이 곧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은 정말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기만 하면 어떤 세속적인 소원도 다 이루어 주시는 건가?”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자가 어찌 잘 먹고 잘 사는 것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만약 그가 그런 기도를 했다면 그의 안에는 주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정말 그의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기도를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이 말씀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에 일치하는 것들을 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하는 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모세, 엘리야, 바울 같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면 홍해가 반으로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왔으며, 엘리야가 기도하면 하늘에서 비가 그치고 또 그가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면 병든 자가 나았고 또 기도하면 귀신도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특별한 삶을 살게 하였을까요? 그 비밀은 그들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을 암송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의 삶을 움직이는 원리가 된 사람.. 즉 말씀이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끊어지는 순간 그 어떤 자양분도 공급받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매일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살아가며 주님 안에 있어야 참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오늘 이 하루와 남은 우리의 평생토록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풍성하게 열매 맺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