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7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한복음 1장 43-51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자인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빌립을 만나시는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3절은 “이튿날”이란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날 다음 날 입니까?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준 날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다음 날 입니다. 그 다음 날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셨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44절에 보면 이 빌립이란 사람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 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가운데 놓고, 가버나움은 북서쪽에, 벳새다는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벳새다는 조그마한 어촌 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빌립 역시 안드레와 같이 본래 세례 요한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립은 갈릴리에서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적으로 응답 했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빌립 또한 안드레와 같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이 분이 메시아이심을 감지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새벽에 살펴 본 내용 혹시 기억 나십니까? 안드레가 예수님이 그토록 자신이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가장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도 이와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한 후 곧 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성경이 빌립과 나다나엘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아 우리가 이 둘이 가족인지 가까운 친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형제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은 가까운 사이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성경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정확하게 계산했던 제자가 바로 빌립 입니다. 셈이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 ‘빌립’이 헬라어식 이름이란 면에서 보면 그는 헬라 문화에서 익숙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했을 때,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빌립은 유대 문화도 익숙하고 헬라 문화에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능통한 1.5세와 같은 사람이 빌립인 셈 입니다.
수에도 밝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빌립, 이처럼 평상시 매우 이성적인 사람인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무척이나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45절 말씀 입니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 자네 내 말을 좀 들어보게. 내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분을 만났어.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야!” 45절에서 빌립이 말한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란 표현 보이십니까? 우리가 얼마전에 새벽예배 때 세레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신명기 18장 15절 말씀을 찾아 본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신이 죽은 이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해 일으키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죠. 또 45절에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 분”, 이 역시 구약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지금 ‘메시아’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예수가 메시아다”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셈 입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46절 입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그는 빌립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떨떠름 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미가서에는 분명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당시에 나사렛이란 동네는 이스라엘의 촌구석 입니다. 오늘날 느낌으로 말하면 서울의 달동네 판자촌인 셈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동네는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한 밤중 강도나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의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동네 입니다. 그러니 이 가난한 촌 동네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하니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말한 것이죠. “빌립, 나사렛이라고? 나사렛이라고? 그 동네에서 무슨 좋은 사람이 나오겠는가?” 이렇게 나다나엘이 말할 정도였으니, 나사렛은 정말 낙후한 지역임은 분명합니다.
자, 이에 대한 빌립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46절 말씀 한 번 다시 보십시오. 후반절에 보면 “와 보라” 영어로 Come and see 입니다. 이 표현 어디서 본 듯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 38-39절 말씀을 봅시다.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 요한이 예수님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39절에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와 보라” Come and see 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였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아마도 나머지 제자가 바로 안드레의 고향 친구이자 신앙의 열심이 있었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죠.
빌립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분이 메시아인 것을 확신했기에,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생각이 180도 변하리라 확신 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자, 이 때 저 멀리서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47절 입니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우리가 나다나엘의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다나엘은 마음이 겸손하고, 진실하고, 말씀에 충실한 경건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다나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속임수나 간계를 쓰지 않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평상시에도 메시아의 오심을 충실하게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 자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다나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기서도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당시 무화과나무는 무성하고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에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뜻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을 때 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깊은 속을 알아 본 예수님께 나다나엘이 말했습니다. 49절 말씀 입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 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으로 부름으로 그 분이 진정 메시아 되심을 고백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앞으로 더 큰 일 볼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50절 입니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요한복음 2장부터 12장에이어지까지 계속되는 일곱 표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일곱 기적들 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심으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보이셨습니다.
51절을 봅시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8장을 보면 아버지 집을 떠난 야곱이 해가 진 후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는 꿈 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사닥다리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 사역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영적 사닥다리가 되시사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열결해주시는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그가 가진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부르시는 주님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